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밥 딜런/일생 (문단 편집) === 1960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7655967-A707-4643-85BE-8E0057D3765F.png|width=100%]]}}}|| ||<#000> {{{#fff '''전설이 되다.'''}}} || 1961년 1월 밥 딜런은 [[위스콘신 대학교]]의 재학생 프레드 언더힐을 알게 된다. 언더힐은 친구인 데이비드 버거와 함께 차를 몰고 뉴욕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과 함께 운전을 해줄 나머지 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밥 딜런은 이 무리에 합류한다. 1961년 1월 24일 세 사람은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가에 도착한다. 맥두걸 가(Mavdougal Street) ‘카페 와?(Cafe Wha?)’로 세 사람은 직행한다. 마침 누구든지 무대로 올라와서 공연이 가능한 ‘후트내니의 밤’[* 포크송을 부르며 춤을 추는 사교적인 집회]이어서 밥 딜런은 거기서 몇 곡을 부른다. 그리고 며칠 후 밥 딜런은 우상 [[우디 거스리]]와 대면한다. 거스리는 뉴저지 주 모리스타운(Morristown)에 있는 그레이스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밥은 몇 번에 걸쳐 거스리를 찾아갔다. 주말 동안 외출허가를 받은 거스리가 그의 친구 시드셀의 집에 있을 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는 거스리의 동료들이 많이 있었는데 [[피트 시거]], 잭 엘리엇 등이 거스리의 주변에 모여 거스리의 곡을 불러줬다고 한다. 밥 딜런은 맨해튼으로부터 버스로 한시간 반, 정류소에서 병원까지 약 1km 거리를 걸어갔고 병원에서 밥이 직접 골라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고 거스리에게서 특정 노래를 요청받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날 밥 딜런은 거스리에게서 미발표 노래나 아직 곡조를 붙이지 않는 시가 자택에 있으므로 그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거스리의 집을 가지만 이때는 발견을 못했다. 밥 딜런이 우디 거스리의 미발표곡을 부를 일은 그 후에도 없었다. 미발표 작품군은 거스리의 딸 노라에 의해 1998년 빌리 블랙과 [[윌코]]가 리코딩해 ‘Mermaid Avenue’라는 앨범을 통해 나온다.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밥은 포크로어 센터에서 데이브 반 롱크와 우연히 만난다. 밥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어떻게 하면 게스라이트[*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던 카페로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카페다. 비트족 시인들이나 전설적인 포크 가수들이 거주한 곳이다.]에서 일할 수 있는지 반 롱크에게 물었다고 한다. 밥이 한 곡을 부르자 반 롱크는 그 날 게스라이트에서 자신이 올라갈 스테이지에 밥 딜런을 깜짝 출연시켜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 롱크와 밥은 친밀한 선후배 사이가 된다. 반 롱크의 아내 테리가 밥이 출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주는 부킹 매니저 역할을 담당해준 시기도 있었다. 이 당시 밥은 노래, 기타 테크닉, 곡 해석, 편곡 등을 반 롱크로부터 배웠다. 반 롱크에 의하면 밥 딜런은 “직접 가르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만, 나중에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라고 했다. 밥 딜런은 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선배 가수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높아진다. 당시는 [[재즈]]의 인기가 시들어지고 포크 가수가 많이 늘어났다. 여러 커피하우스, 라이브하우스에서 매주 누구든 즉석에서 자유롭게 참여 가능한 후트내니가 개최되었다. 그 당시 아마추어 포크가수들은 유창한 코러스나 청아한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밥 딜런은 거스리 류의 거친 방식을 취한 특이한 존재였다. 애초에 그 당시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족적을 따라 미국 내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고 자기소개했다. 이 당시 이질적인 존재였던 딜런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밥 딜런의 애호가들이 점점 생겨난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유명한 라이브하우스 ‘거디스 포크 시티’에서도 매주 월요일 밤 마이크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밥 딜런은 자주 그곳에 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반 롱크나 톰 팩스톤, 더 클랜시 브라더스 등 선배거물 가수들이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여러 명의 지인들을 얻게 되는데 밥의 인기가 점점 늘어나면서 밥 딜런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날만이 아니라 포크 시티의 정식 무대에 출연시키자는 여론도 높아진다. 가게 주인인 마이크 포코(Mike Porco)마저도 밥 딜런을 눈여겨봤고 뉴욕에 도착한지 겨우 2개월 만인 1961년 3월, 포코는 밥에게 2주간 출연을 제안한다.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무대였다. 그 당시 밥 딜런은 뮤지션 조합에도 등록하지 않은 상태일뿐더러 음주점포 출연용 허가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 21세도 안 넘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서도 필요했다. 그때 가게 주인 포코가 보호자로 나서주며 조합등록비용 46달러까지 부담해 줬다. 1961년 4월 11일 밥 딜런은 포크 시티의 무대에 선다. 2주간 무대에 선 까닭에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와도 친해진다. 이때 불렀던 무대 레퍼토리는 우디 거스리의 곡 외에 반 롱크가 편곡한 ‘House of the Rising Sun’이나 자작곡 ‘Song to Woody’가 포함되어 있었다. 5월 6일에는 코네티컷 주 브랜보드에 열린 인디언 네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출연한다. 같은 달 미나애폴리스로 귀성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노래를 부른다. 전 여자친구였던 보니 피처(Bonis Beecher)가 이때의 밥의 노래를 25곡 녹음했다. 그리고 다시 그리니치 빌리지로 돌아와 활동을 하는데 이때 가수만이 아니라 코미디언도 그리니치 빌리지 카페에 출연했는데 [[빌 코스비]], 리처드 브라이어, [[우디 앨런]], 존 리버스, 레니 브루스, 후에 개명을 한 ‘피터 폴 앤 매리’의 일원으로 유명해진 노엘 폰 스투키 등이 있었다. 밥의 초기 자작곡 ‘Talking Bear Mountain Picnic Massacre Blues’의 바탕이 되었던 신문 기사를 밥에게 건넨 사람도 스투키였다. 또한 스투키는 밥의 능력을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게스라이트, 포크시티를 거점으로 밥은 적극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에릭 본 슈미트, 렌 챈들러, 폴 클레이튼, 루크 에스큐, 할 워터즈, 존 윈, 루크 파우스트 등 수많은 재능 있는 인사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즈음인 1961년 7월 29일 밥은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진행된 12시간 실황중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송국 WRVR-FM 주최로 그리니치 빌리디 포크계의 주요 가수들이 차례로 노래하는 기획이었다. 무대를 내려온 밥 딜런은 17세 수지 로톨로와 2년간 사귀게 된다. 수지는 10대 전반부터 각종 항의 운동에 참가한 여성이었고 포크송과 가깝게 지냈다. 이때부터 친구들이나 지원자들 집에서 전전하길 그만두고 처음으로 집을 빌린다. 수지는 밥 딜런에게 많은 영향을 줬는데 예술을 지향한 수지 덕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만난 지 2개월 후, 1961년 9월 29일 밥 딜런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일어난다. [[뉴욕타임즈]]지에 포크 시티에서의 밥 딜런의 무대를 절찬하는 평론가 로버트 셸턴 평이 게재된다. >거디스 포크 시티에 포크 음악에 새 얼굴이 출현했다. 비록 겨우 스무 살이지만 밥 딜런은 요 몇 달 새 맨해튼 카바레에서 연주한 스타일리스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다. > >합창단 소년과 [[비트닉]] 사이의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딜런씨는 천사 같은 얼굴과, 허클베리 핀의 검은 코듀로이 모자로 일부 가려진 대걸레 같은 더벅머리를 지녔다. 그의 옷은 어쩌면 재단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기타나 하모니카, 피아노를 연주하고 새로운 곡들은 기억도 못 할 만큼 빨리 작곡하는 그가 터질듯한 재능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딜런씨의 목소리는 예쁜 것과 정반대다. 그는 뒤편 현관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사색에 빠져 있는 남부 노동자의 거친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포착하려 한다. 모든 외피와 내피들이 그의 음표 위에 남아 있었고, 그의 노래에는 타는 듯한 강렬함이 배어 있다. > >(중략) > >포크에 대한 딜런 씨의 고도로 개인적인 접근법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그는 스펀지처럼 영향력들을 빨아들여왔다. 이따금 그가 의도하는 극적 효과는 과녁을 벗어나 멜로드라마가 되고, 그의 스타일라이제이션은 도를 넘어 자연스러움을 잃고 위태롭게 기우뚱한다. 그렇지만 모든 이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해도, 젊음 때문에 더욱 주목할만한 그의 음악 만들기는 독창성과 영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딜런 씨는 자신의 선조들과 출생지에 관해 모호함은 보이지만, 그가 어디로 왔느냐보다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는 곧장 위로 갈듯하다. >---- >― 밥 딜런. 눈에 띄는 스타일리스트’, 로버트 셸턴 신문에는 모자를 쓰고 타이를 매고 큰 기타를 든 딜런의 러프한 사진이 7센티미터가량의 공간을 차지했다. 이 칼럼을 통해 밥 딜런은 엄청나게 인지도가 상승한다. 그의 후원자였던 음악가들과 밴 로크는 “무척, 무척 좋은 일”이라고 말했고 팻과 톰 클랜시 형제는 “바비는 재능이 많아요. 멀리 갈 자격이 있어요”라고 평했다. 딜런은 금요일 밤 포크시티에 나타났는데 칼럼을 보고 밥 딜런을 보려고 찾아온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무렵 밥에게 커다란 선물이 찾아온다. 밥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려 했다”. 로버트 셸턴의 호평 덕분에 컬럼비아 레코드의 거물 프로듀서 존 해먼드(John Hammond)가 밥에게 흥미를 나타낸다. 9월 말 컬럼비아 레코드사 소속의 캐롤린 헤스터의 리코딩에 밥이 하모니카 연주가로 참가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됐고 그때 리코딩 프로듀서가 해먼드였다. 이때 딜런은 평론가 로버트 셸턴에게 이 일을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아까 존 해먼드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더러 컬럼비아하고 5년짜리 계약을 하재요. 그렇지만 제발, 비밀로 해줘요. 월요일이나 되어야 확실해지거든요. 심지어 내 노래도 안 들어보고 서명을 하래요!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셸턴. 컬럼비아의 어떤 윗대가리가 엎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진짜로 미팅이 성사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 뒤 1961년 10월 26일, 밥 딜런은 컬림비아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는다. 이때의 소식은 당연히 포크 시티에도 퍼지는데 딜런은 질투를 받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의 뉴욕타임스 평과 그의 컬럼비아 계약 양측에 경악한 미네아폴리스의 포크서클에도 반향이 일었다. 정식 계약 9일 후, 이지 영의 기획으로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밥 딜런은 첫 솔로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 콘서트 프로그램에 싣기 위해 이지 영은 밥에게 활동 경력, 성장 과정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보냈다. 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미네소타 태생으로 뉴멕시코에서 성장. 미시시피에서 거주하다 아이오와, 사우스다코타, 켄자스를 거쳐 열네 살 때 카니벌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일한 후 시카고의 길거리 가수 그레이라는 사내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 미네소타 태생 외에는 다 거짓말이다.] 계약 후 딜런의 데뷔 앨범 ‘[[https://en.wikipedia.org/wiki/Bob_Dylan_(album)|Bob Dylan]]’은 즉시 리코딩을 시작한다. 녹음은 1961년 11월 20일과 22일, 겨우 이틀이었다. 경비는 402달러가 들었다. 가지고 있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당초부터 상정되어 있었다. 거스리의 곡들은 녹음을 마쳤지만 결국 수록되지 못했다. 녹음은 정말로 빨리 끝났지만, 1962년 3월 19일에야 출시한다. 관료주의로 인한 이 긴 기다림은 딜런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1961년 말 엄청난 모멘텀을 느끼고 있던 딜런에게 그 다섯 달간의 답보 상태는 가혹한 안티클라이맥스였다고 한다. 앨범 커버는 풋내기 청년스러웠지만 노래와 연주는 대담한 연주로 가득했다. 심지어 수지의 사랑에 빠져있을 때였는데도 죽음과 슬픔에 관한 노래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디 거스리의 헌정곡 ‘Song to Woody’도 이 앨범에 들어가 있다. 음반은 일부에서는 호평받았지만 반응은 미미했고 이 앨범이 많이 팔리기 시작한것은 밥 딜런이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2년이나 지난 후 였다. 컬럼비아 지역에서는 밥 딜런을 “존 해먼드의 실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만큼 밥의 전망을 밝게 본 사람은 소수였다. 데뷔 앨범에 두 곡 밖에 자작곡을 담을 수 없었지만 밥 딜런은 창작열을 불태웠다. 밥 딜런은 프로듀서 헤먼드가 준 [[로버트 존슨]]의 1930년대 중반의 음원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됐다. 밥 딜런은 존슨의 노래를 몰입해서 들었고 가사를 필사하며 그 구조와 내용을 분석했다. 밥 딜런은 존슨이 만든 노래를 통해 정교한 기술과 본능적인 영감의 결합을 발견해낸다. >그때 만약 로버트 존슨을 듣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시들이 내 내면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문자로 바꿀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까지 쓰며 로버트 존슨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밥은 1962년 무대에서 존슨의 ‘Kind Hearted Woman’를 부른다. 비공식적으로 녹음 기록이 있다. 당시 포크송의 주류는 잘 가다듬고, 명확하게 곡의 근거를 제시하고, 새롭게 집어넣은 부분이 어디인가를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과는 크게 상이한 데뷔 앨범을 만든 밥 딜런이 자작곡을 만든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당시 직접 작사, 작곡해서 노래하는 포크 뮤지션은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기성의 곡들에 독자적인 필치를 가미해서 노래하는 쪽이 주류였다. 1962년 2월 피트 시거의 알마넥 싱어즈 시절 동료였던 아그네스 시스 커닝햄과 그의 남편 고든 프라즌이 포크를 전파하기 위한 잡지 ‘Brodside’를 창간한다. 그 창간호에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를 비꼰 밥 딜런의 자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AylFqdxRMwE|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의 가사가 게재된다. 처음으로 딜런의 작품이 인쇄물이 실렸던 것이다. 밥은 그 무렵 이미 [[미시시피주]]의 흑인 청년 에멧 루이스 틸 살인사건을 제재로 한 ‘[[https://www.youtube.com/watch?v=RVKTx9YlKls|The Death Of Emmett Till]]’, 클랜시 브라더즈의 멜로디에 가사를 12소절까지 단 ‘[[https://www.youtube.com/watch?v=im0FiKYu2go|Rambling, Gambling Willie]]’, [[냉전]] 체제에 대한 강박관념을 노래로 만든 ‘[[https://www.youtube.com/watch?v=13KcdxpRn4Y|Let Me Die in My Footsteps]]’ 등의 곡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곡들에는 인종평등회의나 인권운동에 참가했던 여자친구 수지의 영향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1962년 이후 밥 딜런은 자작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가 부르고 싶은 타입의 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다. 1963년 봄에는 수지가 제작 조수로 일한 음악극 ‘Brecht on brecht’를 보고 커트 웨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충격을 받는다. 밥은 그들의 작품을 “가사의 형식이나 운문(Verse)간의 자유로운 관계, 그 음악적인 구조, 효과적인 멜로디 패턴에 관한 상식적인 무시. 그러한 것들이 이 노래를 참신하고 첨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라고 평했다. 데뷔 앨범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1962년 4월 다음 앨범의 리코딩을 위해 밥을 스튜디오를 부른다. 이 시기는 밥 딜런이 [[Blowin' in the Wind]]를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No more auction block’을 바탕하고 있다. 밥은 훗날 ‘이 곡에는 흑인 영가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특정 사항이나 인물을 제재로 하여 토피컬송 중심으로 작곡하던 밥이 스스로의 심정을 바탕으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밥이 개스라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직후, 1962년 5월 잡지 ‘Brodside’ 제6호에 이 노래의 가사가 게재되었다. 순식간에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청년 가수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 노래의 매력을 느낀 포크업계 매니지업 종사자 앨버트 그로스맨은 딜런은 접근하고 설득 끝에 밥은 1962년 8월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WwgrjjIMXA)]}}} || || 1963년 3월 Live On TV || 프로듀서 해먼드는 두 번째 앨범은 데뷔 앨범과는 다른 제작 방식을 택했다. 기타를 치면서 단 시간에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밥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방식이었다. 리코딩은 1962년 4월 24일부터 1963년 4월 24일까지 간헐적으로 8회에 걸쳐 진행됐다. 리코딩 스튜디오에 보조역으로 녹음 등에 개별참가하는 세션맨들이 모인 것도 세 번이나 됐다. 밥이 다른 뮤지션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헤먼드는 지켜봤다. 앨범은 데뷔 앨범과 마찬가지로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하는 곡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The Freewheelin' Bob Dylan]]’이란 제목으로 1963년 5월 27일 발매된다. 겨울날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는 수지와 밥의 다정한 사진이 앨범 재킷을 장식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서서히 화제가 되어 빌보드 앨범 차트 22위를 기록한다. 순위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데뷔 앨범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런 가운데 매니지먼트 그로스먼은 히트 싱글을 만들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룹 피터 폴 앨 메리에게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을 부르게 한다. 당시 빌보드 차트 1위는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고 걷자’가 3주 연속 1위에 올랐다. 폴 앨 메리의 ‘Blowin' in the Wind’는 잰 앤 딘의 ‘Surf city’, [[엘비스 프레슬리]]의 ‘Devil in Disguise’, 더 서파리스의 ‘wipe out’과 경쟁을 벌이며 1963년 8월 17일자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한다. 앨범 판매량은 이미 100만장을 넘었다. 딜런의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유명한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1963년 5월 12일 일요일 밤 딜런의 출연 예약을 잡았다. 그 프로그램은 딜런 같은 저항과 동일시되는 가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최종 리허설 때 딜런을 늘 그렇듯 대충 주워 입은 차림새로 나왔다. 딜런은 설리번과 티비 프로듀서 앞에서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를 불렀다. 그러나 최종 리허설 직후 CBS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집자인 스토 펠프스가 그 노래는 쓸 수 없다고 통보하고 이 소식을 들은 그로스먼과 딜런은 분개한다. 에드 설리번은 딜런에게 다른 노래를 바꾸겠냐고 묻는다. 딜런은 한 바퀴 돈 후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노래를 못 부르게 하면 아무 노래도 안 부를 겁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를 쿵쿵 거리고 나갔다고 한다. 언론들은 일제히 [[CBS(미국 방송)|CBS]]를 비난했다. 뉴욕 포스트는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다.”라고 말했고 해리엇 밴 혼은 “CBS 상층부는 우리 시대의 심각한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딜런이 부를 예정이었던 검열당한 노래는 외설도 중상모략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은 점점 커졌고 딜런은 연방통신위원회에 공개 조사를 요구했으나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딜런은 실제로 설리번 쇼 파행 이전엔 녹화된 텔레비전 방송엔 출연했지만 그것은 5월 말에야나 가서 방송되었다. 딜런의 첫 텔레비전 경험은 12월 [[BBC]]였다. 그 다음번 출연은 뉴욕 WBRW 방송사 자유의 노래 쇼였다. 그 후 수많은 텔레비전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 딜런은 오로지 최적의 조건에서의 올바른 쇼를 원했다. 1963년 5월 18일,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에서 열린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조안 바에즈]]와 처음으로 공연한다. 다음 달인 6월 피트 시거 등과 함께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서 개최된 ‘전미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가 주최하는 ‘선거인등록 집회’에 출연한다. 공민권 운동의 최전선이었던 남부에서의 첫 공연이었다. 밥 딜런은 거기서 경관의 감시, 백인 집단의 압력 속에서 이유 없이 살인의 희생자가 된 메드거 에버스를 그린 ‘Only a Pawn in Their Game’을 부른다. 같은 달 26일부터 28일에 걸쳐 개최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밥을 출연한다. 그 페스티벌에는 바에즈도 출연했다. 수지도 밥과 동행했지만 바에즈가 “이것은 옛날에 끝난 연애를 노래한 곡입니다”라고 코멘트를 한 뒤 밥 딜런의 노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부르기 시작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며 회장을 뛰쳐나갔다. 밥은 그 여름 내내 바에즈의 전미 투어에도 동행했다. 그 무렵 The Freewheelin' Bob Dylan의 판매량도 호조를 누리며 밥 딜런은 미국 전역에 걸쳐 주목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LwHnNybADo)]}}} || ||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 || 1963년 8월 28일 밥은 바에즈와 함께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다. 정치집회, 데모에 참가하는 일은 전혀없었던 밥 딜런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집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그 집회다. 밥은 바에즈와 함께 ‘Only a Pawn in Their Game’, ‘Blowin' in the Wind’을 부른다. 이때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도 해서 밥 딜런의 인지도를 대폭 증가 시켰고 '''밥 딜런이 사회적, 정치적 제언을 노래로 만드는 리더인 것처럼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다.''' 10월 밥 딜런은 ‘뉴스위크’의 기자 안드레아 스베드베리(Andrea Svedberg’의 취재를 받는다. 밥 딜런 측은 앨범의 프로모션으로 취재에 응했으나 스베드베리는 밥 딜런이 애매하게 감췄던 출신지나 가족에 대해 폭로하는 취재를 진행했고 노골적으로 딜런을 궁지로 몰아넣어서 오만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험악한 인터뷰는 악의적인 기사로 이어졌고 밥 딜런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지조 없이 날조한 미네소타 중산층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부모님과 동생과 몇년과 인터뷰를 끊었고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언론에 대한 편집증적인 불신도 커졌다. 또한 뉴스위크도 오명을 입었고 음악가와 미디어의 고문 같은 관계의 시대가 이때부터 형성됐다. 이 사건은 밥에 대한 주목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밥은 스베드버리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의 안쪽 재킷과 앨범을 싼 종이에 장편시 ‘11개의 개설의 의한 묘비명’을 실었다. 그 안에서 밥은 ‘진실을 제대로 답변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협박 비슷한 대화를 적어 넣은 뒤, ‘당신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멸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변덕스러움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사건은 밥 딜런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는 발단이 된다. 앨범이 대성공하며 세상의 추세에 의해 밥 딜런은 사회파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리더격이 되었다. 1년 전과의 취급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대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회적인 사건, 부정이나 차별에 관한 갑론을박이나 온갖 인간들의 군상, 인간들의 부조리한 행동이나 사고를 노래의 소재로 삼는 일은 있었지만 이미 밥 딜런은 개별적인 사항을 직접 전달하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는 1963년 8월과 10월, 총 6회의 리코딩을 통해 23곡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도 모두 밥의 기타와 보컬과 하모니카만으로 이루어졌다. 프로듀서는 전작의 마지막 세션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톰 윌슨[* 1954년 23살에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세실 테일러, [[존 콜트레인]], [[선 라]] 등의 앨범을 제작, 발매했다. 1963년에는 컬럼비아 레코드사 프로듀서가 됐다.]이 역임했다. 존경하는 우디 거스리의 앨범 ‘Woody Guthrie Sings Folk Songs’을 모방한 재킷 사진이었고 전작이나 데뷔 앨범과는 다른 심각하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앨범은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한참 앞지르는 시사가요들을 선보였다. ‘해티 캐롤’, ‘온리 어 폰’, ‘홀리스 브라운’은 뉴스 기사들에 자극받아 쓴 노래들이었지만, 자신감으로 넘쳤던 딜런은 더 큰 비전과 더 큰 보편성으로 좀 더 복잡한 이야기들을 가득 채웠다. 이 앨범은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 앨범이지만 발매 당시에는 평가가 엇갈렸다. 1963년 10월 26일 [[카네기 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장내는 만원이었다. 밥은 부모님들을 초대했고 콘서트의 청중들은 이미 포크 애호가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로 폭이 넓어졌다. 콘서트가 끝나고 분장실은 밥을 보기 위해 밀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밥이 탄 차의 지붕이나 유리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높아진 인기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긴급시민자유회의(ECLC)는 ‘시민의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에 혁혁한 공헌이 인정된 인물’로 1963년도 토마스 페인 상을 수여한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은 너무 긴장해서 술을 너무 마셨고 술에 취한 채로 수상 연설을 한다. >머리카락이 부족한 노인들은 길을 양보해야 합니다.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리카락이 없습니다. 무척 불쾌합니다. 검은색도 흰색도 오른쪽도 왼쪽도 없습니다. 위도 아래도, 아래는 땅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수렁입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어올라 보려고 합니다. 나는 좌익의 수하가 아니며 혼자 서고 혼자 걷는 음유시인입니다. 묘기를 부리는 바다표범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졌고 많은 참가자들이 밥 딜런에게 분노하다. 애당초 밥에게는 스스로 사회파, 활동가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시민자유회의 사람들은 밥을 사회파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상을 수여했다. 연배의 활동가들은 노골적으로 밥을 젊은 세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기대했고 그것은 밥의 노래가 구세대 좌익들에게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밥 딜런은 긴급시민자유회의에 상을 거부하지도 않고 면전에 모욕을 주었다. 바에즈와 동행했던 196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콘서트 투어 도중, 바에즈 자택에 체재했을 때에 하루 종일 무엇을 쓰는 것에 열중했고 이때 장편의 산문들을 썼는데 훗날 출판되는 밥 딜런의 첫 소설 ‘타란튤라’의 바탕이 됐다는 설도 있다.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을 묘사한 ‘The Lonesome Death of Hattie Carroll’[* 백인 부잣집 출신 남성 '윌리엄 잰트징어'가 술에 취한 채 호텔 여종업원들을 지팡이로 마구 폭행하는 과정에서 그 여종업원 중 한명인 중년 흑인 여성 '해티 캐럴'이 사망한 사건과 그 뒤에 이뤄진 재판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잰트징어에게 가해진 형량은 '''고작 6개월뿐이다.''' 그 뒤에 잰트징어는 딜런을 그런 개쓰레기 같은 거짓말로 가득한 노래를 만든 놈을 감옥에 처넣겠다며 디스하다가 결국 2009년 1월 3일에 69세의 나이로 사망.]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정갈하고 억제를 통해 시적 정취가 넘치는 작풍을 쓰기 시작한다. 미국 내 각지를 순회공연이 끝나고 뉴욕을 돌아오고 수지 로톨로와 완전히 이별한다. 이때의 상심이 그 후 노래에도 반영된다. 1964년 5월 7일에는 런던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개최된 콘서트를 성공시켰다. 영국에서도 밥 딜런 붐이 일어나는데 1집 ‘Bob Dylan’, 2집 ‘The Freewheelin’ Bob Dylan’도 영국에서 좋은 평을 얻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다. 이 런던 체재 중 밥 딜런은 [[존 레논]]에게서 “콘서트에 가고 싶었다”라는 전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국 투어 직후 1964년 6월 9일 밤, 6시간 만에 4번째 앨범 전곡을 순식간에 녹음한다. 앨범명은 ‘Another Side of Bob Dylan’. 이 앨범에는 그동안 밥 딜런이 지금까지 사회적인 이슈를 담은 노래가 한 곡도 없다. 러브송,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부른 작품도 적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블루스, 토킹 블루스를 과거에는 없던 난폭한 스타일로 불렀다. ‘Ballad in plain d’는 수지와의 결별을 은유가 아닌 노골적으로 노래한 노래다. 가벼운 노래는 적으나 여태까지의 이상으로 친근한 멜로디를 가진 곡들이 많다. 이 앨범을 듣고 여태까지 밥 딜런을 ‘저항가수’로만 인식한 일부 포크팬들은 ‘밥 딜런이 과거를 부정해버렸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앨범에 수록된 My Back Pages라는 노래의 후렴구가 '''아, 그땐 내가 너무 늙어버렸지, 지금의 난 훨씬 젊다구'''였으니. 앨범은 1964년 8월 8일 발매한다. 이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는데 밥은 “사회는 경고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발하는 것은 젊은이였습니다. 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밥 딜런’입니다.[* 밥은 자서전에서 이 발언이 나를 굉장히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라는 소개를 받으며 올라간다. 노래는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수록곡 위주를 부르게 되는데 무대의 평은 좋지 않았다. 기존과는 매우 다른 앨범으로 포크 평론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이 해 여름에는 밥 딜런의 인생의 중요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컨트리 음악의 거장 [[조니 캐쉬]], 당대 최고의 밴드 [[비틀즈]]였다. 참고로 비틀즈는 ‘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듣고 딜런의 팬이 되었다.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리코딩으로부터 반년 후 1965년 1월 중순, 다음 앨범용 리콘딩 세션이 진행된다. 이번엔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 게 아니라 스튜디오에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의 실력자들을 모았다. 이때 밥 딜런은 매일같이 완성되는 곡들을 빨리 녹음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는데 곡조, 머릿속에서 분출되는 언어들의 비트가 자기 혼자 기타나 피아노를 치면서 만들어내는 사운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안에서 밥은 이 무렵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혼자 해나갈 생각은 없었다. 소규모 밴드가 있는 편이 노래의 힘을 보다 잘 끌어낼 수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일렉트릭으로 연주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현대풍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옛날 타입의 음악이라 생각되던 컨트릭 뮤직도 일렉트릭 계통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 들어간 딜런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에 반응한 연주를 참가자 전원이 그 자리에서 계속 만들어간다. 사전 설명이 아주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곡조에 대한 밥 딜런의 희망사항도 적었다. 처음 시작할 때 카운트를 세지 않는 곡들도 있었는데 밥이 기타를 두 소절이나 네 소절 치며 모두 황급히 그에 맞춰간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제각각 밥의 음악을 듣고 자신만의 연주를 보여줬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던 브루스 랭호른은 그때를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형식의 음악은 팝 업계에서도, 포크 세계어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밥 딜런이 본능을 통해 방출한 음악은 겉으로 보이는 장르를 파괴했다.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두 곡을 포함한 전 11곡이 오버 더빙 편집도 없이 한 장의 앨범에 수록된다. 앨범 제목은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년 3월 22일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6위, UK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쳤고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다. 그로부터 약 3주 후 밴드 버즈가 밥 싱글 ‘Mr, Tambourin Man’을 커버한다. 이 노래는 1966년 6월 26일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앨범 발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6월 15일, 밥 딜런은 새 앨범을 작업하기 위해 리코딩 세션을 개시한다. 드럼에는 바비 그레그, 베이스에 러스 새버커스, 피아노와 오르간의 폴 크리핀, 그리고 기타에 마이클 블룸필드가 참가한다. 15일에는 세 곡을 시험 삼아 연주했다. 그중에 ‘[[라 밤바]]’같은 코드 진행의 왈츠 곡도 있었다. 이 날은 어렴풋한 형태에서 그 원형 같은 것이 완성되려던 참이었다. 다음 날인 16일 밥은 그 곡에만 집중한다. 충동적으로 내뱉는 것처럼 가사를 적었더니 노트 20페이지 분량의 긴 이야기가 가사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곡으로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바로 역사상 최고의 노래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Like a Rolling Stone]]’이다. 밥은 이 노래를 싱글 음반으로 발매할 것을, 리코딩이 완료되는 순간 희망했다. 그러나 컬럼비아 레코드는 난색을 표했는데 이유는 6분은 너무 길다고 영업부, 홍보부가 모두 반대했다.[* 이전에도 다 합쳐서 6분 정도 되는 히트곡은 있었다. 1959년 발매된 레이 찰스의 ‘What’d I Say, 아일리 브라더스의 ‘Shout’ 등인데, 모두 곡의 반을 잘라 a면과 b면으로 나누어 발매된다.] 컬럼비아 측은 ‘뭘 노래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다시 녹음해’라고 요구한다. 결국 발매가 보류되는데 이 곡의 테스트 음반은 오피스 서랍에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 사무실이 이사를 가게 되자 신곡의 악보 담당 코디네이터 컨시다인은 우연히 다시 그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그 음반을 뉴욕의 인기 디스코 ‘아더스’에 가지고 가서 DJ에게 부탁해 시험 삼아 틀어보라고 한다. 손님들은 그 노래에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날 밤 이 노래는 몇 번이나 리퀘스트를 받는다. 그 DJ와 그 가게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 디렉터가 다음날 컬럼비아 레코드에게 ‘[[Like a Rolling Stone]]’을 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1965년 7월 20일 긴급 발매가 결정된다. 선전 문구는 “6분짜리 싱글이라고? 아무렴 어때 밥 딜런을 6분 동안이나 들을 수 있는걸”이었다. 이 곡은 비틀즈의 ‘[[Help!]]’와 같이 빌보드 차트를 진입하고 1965년 9월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1965년 7월 25일, [[Like a Rolling Stone]]을 처음으로 공개한 공개적인 석상인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고 발표한다. 전날인 7월 24일 앨런 로맥스가 주최자였던 블루스 워크숍에 밥의 친구 마이클 블룸필드가 소속되어 있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가 출연했다. 그때 로맥스는 그들을 “중산 계급 출신 백인 애송이들의 블루스 밴드로 수상쩍은 자들이니 조심하도록”이라며 소개했고 이에 대해 밴드의 매니저 담당을 맡기로 했던 밥의 매니저 그로스맨은 격노한다. 이 광경을 본 밥 딜런은 다음 날 갑자기 무대를 블룸필드를 중심으로 일렉트릭 세트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평론가들은 비아냥거렸던 로맥스의 대응에 밥 딜런은 포크 교조주의자에 대한 혐오가 용솟음친 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어쿠스틱 연주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한다. '''그 당시 포크 팬들은 포크가수란 포크 부흥의 정신과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의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했다.''' 물론 밥을 호응하는 관객들도 있었는데 당시 객석을 바라보고 있던 동료 뮤지션 마리아 물다우르는 “관객들은 3분의 1 정도가 야유를 보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무대 뒤에서는 “이건 포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파와 “이것이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이니 변화를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파가 격론을 벌였고 밥 딜런은 당시 객석으로부터 “이래도 네가 동료냐!”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그때의 반응은 연주했던 곡이나 귀에 들리고 있던 곡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뉴포트 페스티벌 4일 후, 밥은 새로운 앨범을 위한 리코딩을 재개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으로 바뀐다. 그중에는 객석에 비난에 응하여 “나를 동료라고 부르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라고 노래하며 보수적인 포크계를 강하게 비판한 “Positively 4th Street’란 곡도 있었다. 리코딩은 8월 4일까지 계속됐고 월말에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명은 ‘[[Highway 61 Revisited]]’. 마이클 블룸필드가 활약했고 로큰롤과 블루스가 약동하는, 가사도 연주도 공격적인 앨범이었다. 전작보다 더 명료한 앙상블 사운드를 가져서, 개별 악기들과 그 위의 목소리가 더욱 명료했다. 앨범은 극찬을 받았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높아진 인기로 인해 밥 딜런이 본인 커리어 최장/최대 투어를 개최한다. 1965년 9월부터 1966년 3월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도합 50회 무대를 소화한다. 무대는 전반이 밥의 솔로, 후반이 밴드 주도의 일렉트릭 세트라는 구성이었다. 투어 자체는 밥의 희망이었지만 2부 구성은 매니저 그로스맨의 제안이었다. 투어에 앞서 준비를 겸해 8월 28일에는 뉴욕 포레스트힐 테니스 스타디움, 9월 3일에는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볼에서 콘서트를 개최한다. 콘서트는 매진됐으나 포레스트힐에서는 야유가 극심했고 반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열광적인 성원을 얻었다고 한다. 밥은 장기 투어를 뒷받침해 줄 밴드를 찾고 있었고 더 호크스가 낙점됐다. 이 투어는 ‘더 밴드’와의 인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투어 도중 아주 잠깐 동안의 휴일인 1965년 11월 22일, 밥 딜런은 사라 로운즈와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식에 참석한 사람은 매니저 그로스맨과 사라의 가정부뿐이었다. 다음 해 1월 6일에는 두 사람 사이에 첫아이 제스 바이런 딜런이 태어난다. 투어가 장기간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밥은 이동하는 사이에 시간을 내서 그룹 더 호크스와 다음 싱글이나 앨범용 리코딩에 착수한다. 녹음장소는 주로 뉴욕이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녹음이 시도되었다. 프로듀서 밥 존스톤은 자신의 고향 내슈빌에서 녹음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밥 딜런은 뉴욕을 주 녹음장소로 염두에 두었기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6년 2월 중순, 밥과 더 호크스가 남부에서 투어를 돌 예정임을 알게 된 존스톤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찰리 맥코이, 케네스 버트레이, 헨리 스체렉키, 웨인 모스, 허거스 피스 로빈슨, 제리 게네디, 조 사우스 등 당시 내슈빌의 내로라하는 세션맨들을 불러 모았다. 4일간 다섯 곡이 녹음되었다. 곡을 쓰고 녹음하는 작업은 밥이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나서 시작됐고 밥이 곡을 다 쓸 때까지 세션 뮤지션들은 트럼프를 치며 기다리고 한 곡을 다 쓰면 녹음을 한다. 녹음이 끝나면 뮤지션들은 다시 트럼프를 하고 밥은 다시 곡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밥이 곡을 완성하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뮤지션에게 들려주고 일부만을 파악한 채 녹음에 들어간다. 연주는 밥의 손짓이나 호흡을 보면서 진행됐는데 딜런은 뮤지션의 즉흥성을 중시했다. 앨범은 첫 주요 록 사이클을 완성하는 대표적 컬렉션이었다. 그때까지 녹음했던 딜런의 음반들 중 가장 많은 녹음시간이 소요된 음반이기도 했다. 예비 작업은 1965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시작되었고, 이후 간헐적으로 겨울 내내 이어졌다. 음반에는 뚜렷한 사운드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앨범인 ‘Street-Legal’에서 재창조하게된다. 그는 그 소리를 “그 가느다란, 그 거친 수은 사운드”라고 표현했다. 앨범의 제목은 ‘[[Blonde on Blonde]], 1966년 5월 16일 발매된다. 이 앨범 역시 극찬을 받았다. 팝으로서의 유연함과 번뜩이는 영감이 가득 찬 서정성이 서로 즉흥적으로 혼합되어 있고 포크, 컨트리, 블루스, R&B, 그중 뭔가 하나의 장르 속에 가둬두려고 하면 뭔가가 결정적으로 넘쳐 나오는 신선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유행과 완전히 거리가 먼 음악이기도 했다. 이 앨범은 후에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싱글 ‘Rainy Day Women ♯12 & 35’은 앨범이 발매된지 1개월 후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앨범 판매량도 호조를 보였는데 2매 1세트의 LP로서는 경이로운 성적이었다. 이 당시 밥 딜런과 더 호크스는 영국에서 투어를 하는 중이었다. 3월 말 북미 투어를 마친 후 4월 9일 호놀룰루를 시작으로 5월 27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덴마크,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총 24회의 공연을 한다. 9개월이라는 장기투어가 끝나고 밥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해 어떤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음악 이외의 사람들이었다. 나를 ‘시대의 대변인’이라든가 ‘무슨 무슨 양심’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라벨이 붙여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 질문공세를 당하고 그에 대해 답변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싫어졌다.” 당시 밥 딜런의 영국 투어를 중심으로 촬영해왔던 필름 ‘Eat the Document’란 제목으로 텔레비전 방영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밥 딜런 자신이 필름 편집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계획 자체가 좌절될뻔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이 처음으로 쓴 소설 ‘타란튤라’도 출판 계획이 틀어졌다. 내용이 난해했고 교정 작업 중 느닷없이 밥이 전면 교정을 제안한다. 출판사 맥밀란은 1966년 8월 말 출판을 앞두고 프로모션 계획까지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이미 “TARANTULA, Bob Dylan?”이라고 적힌 쇼핑백이 1만개나 팔린 상태였다. 맥밀란은 밥에게 개정 작업을 2주 이내로 완료해달라고 부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술할 오토바이 사고까지 겹치며 타란튤라는 6년 뒤인 1971년 5월에야 간행된다. 이때 차기 투어까지 진행하게 되는데 1966년 8월부터 미 대륙 전역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투어였다. 도합 총 64회였다. 그러나 1966년 7월 27일, 그날 밥 딜런은 이전부터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트라이엄프 500을 타고 뉴욕 교외의 베어스빌에 있는 매니저 그로스맨 저택을 출발했다. 오토바이를 수리해달라고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된 밥은 오토바이로부터 튕겨져 나왔다. 뒤따라오던 아내 사라가 밥을 싣고 병원으로 데려간다. 이 사고에 대한 언론들의 추측은 멈출 줄을 몰랐다. “밥 딜런 중태”, “의식불명”, “목 골절로 위독, 재기불능?” 온갖 찌라시들이 판을 쳤고 한참 지나 척추 몇 대에 금이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밥은 무기한 활동 정지를 발표한다. 투어도 출판도 영화 방영, 신작 녹음까지 모두 백지로 돌아갔다. “그 상태로 계속 내달렸다면 얼마 안가 죽었겠지”라고 당시를 되돌아보며 밥은 말했다. 목에 깁스를 하고 초음파 치료를 받거나 등의 통증을 호소하며 수영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1966년 10월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내년 3월까지 밥의 활동은 없다고 발표한다. 이 당시 요양 중이던 밥을 병문안해준 이는 긴즈버그나 펜베이커 등 극소수의 친구들뿐이었다. 사고가 난 지 몇 개월 후 더 호크스 구성원들과 밥 딜런은 1967년 2월부터 그 해 가을에 걸쳐 30여개의 곡을 써내려갔다. 6월부터는 당시 호크스와 모였던 빅 핑크 지하실에서 2트랙 테이프 레코더가 들어와 그동안 썼던 곡들을 녹음할 수 있게 된다. 녹음은 빅 핑크에서만이 아니라 밥의 자택, 친구 클래런스 슈미트의 집에서도 진행된다. 녹음한 총 테이크 수만 150개였다고 전해진다. 민간 전승곡의 가사가 지닌 신비스러움에 주목한 곡들도 포함된다. 이렇게 빅 펑크 지하실을 중심으로 녹음되어나온 기록물들 중에서 24곡이 선택되어 1975년 6월에 [[The Basement Tapes]]로 정식발매를 하게된다. 이전까지는 유출된 곡들이 수록된 해적판들이 돌아다녔다. 이 앨범은 다양성, 활력, 풍부함 그리고 시기에 구애받지 않은 적절함으로 엄청난 호평을 얻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간판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1975년 최고의 음반, 1967년에 나왔어도 그 해 최고의 음반”, 워싱턴포스트지는 “딜런은 현대 미국 팝 음악이 낳은 단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아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1967년 여름은 [[베트남 전쟁]]으로 다양한 뮤지션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시기였고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같은 기라성같은 뮤지션들이 등장했다. [[히피]]와 [[사이키델릭]]이 미국음악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 전 세계 음악씬에 충격을 줬고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가 등장하며 음악씬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이러한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은둔자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실은 오로지 경쟁뿐인 사회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삶이 변했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조정하고 타인의 책망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단련하여 성장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매스컴은 자신들이 내린 판단을 간단하게는 취하할 수 없었고 나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손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갈아엎어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인식을 고쳐나가야 했다.” 밥이 은둔해 있을 동안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1967년 3월 밥 딜런의 유명한 10곡을 골라 베스트앨범 ‘Bob Dylan's Greatest Hits’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예상 밖의 대히트를 거두며 밥 딜런 최고 판매량 앨범이 된다. 밥은 1967년 7월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재계약을 체결한다. 컬럼비아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기로 약속했고 밥은 새로 4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 의무 사항이었다. 밥 딜런은 컬럼비아와의 재계약 후 내는 첫 작품, 1967년 12월 27일 발매된 ‘[[John Wesley Harding]]’을 발매한다. 당시 현란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사이키델릭 록과는 정 반대의 소리를 담은 앨범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밥 존스톤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녹음은 내슈빌에서 진행되었다. 밥이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반주는 베이스에 찰리 맥코이, 드럼에 케네스 버트레이가 맡았다. 수록곡 모두 이미 작곡이 끝났기에 9시간 만에 녹음을 완료했다. Blonde on Blonde로 내슈빌의 분위기에 친숙해졌고 담담한 노랫소리와 환희가 엷고 넓게 배어져 있는 앨범이었다. 딜런은 이 앨범에서 멜로디 라인과 꼭 필요한 반주로만 이루어진 포크-컨트리의 단순성을 지향했다. 이 앨범 역시 평단에게서 극찬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히트를 친다.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첫 주에만 25만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혹자는 이 앨범을 “최초의 성경적 록 음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68년 1월 20일 드디어 사고 후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 선다. 그 전년도인 1967년 10월 3일 사망한 포크의 전설 우디 거스리를 추도하는 콘서트였다. 컨트리풍 정장을 입고 더 호크스에서 더 밴드로 이름을 바꾼 그룹과 함께 거스리의 곡 중 세 곡을 노래했다. 공연 마지막에 출연자 전원이 함께 부른 합창곡도 참여한다. 같은 해 6월 5일,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귀향을 하게된다. 같은 달 아들 사무엘이 태어난다. 그 전년도에 딸 안나가 태어났고 밥은 그렇게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1969년 4월 세 번째로 내슈빌에서 녹음한 앨범 ‘[[Nashville Skyline]]’을 발표한다. 앨범 재킷 사진은 밥이 웃고 있는 사진을 썼는데 이 사진 자체는 램블링 잭 엘리엇의 앨범에 대한 패러디이다. 앨범에는 대중적이고 목가적인 곡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을 듣고 딜런의 팬들은 놀라게 되는데 밥이 기존과 전혀 다른 목소리인 거칠고 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 앨범으로 ‘컨트리 음악의 딜런’으로 이미지 변신을 성공하며 앨범도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은 컨트리의 거장 조니 캐쉬와 듀엣을 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도 수록되어 있다. 밥과 캐쉬는 그 후 듀엣 앨범까지 녹음하려 했으나 무산된다. 이 당시 ‘조니 캐쉬 쇼’도 출연한다. 1969년 9월 20일 멜로디 메이커가 조사한 국제 팝 설문조사 결과 딜런은 국제적 남성 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1969년 4월부터는 새로운 앨범을 작업하게 된다. 이 앨범은 오리지널 노래뿐만이 아니라 커버곡도 녹음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앨범이 바로 ‘Self Portrait’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본인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 당시 밥은 “생각이 난 것은 뭐든지 벽에 내동댕이치고, 벽에 들러붙은 것을 모두 발표한다. 벽에 들러붙지 않았던 것들을 다 긁어모아 그것 역시 모두 발표한다”라는 생각하고 ‘Self Portrait’를 발표한다. 나아가 이 앨범은 밥이 여태까지 들어왔던 20세기 전반의 포크송, 블루스와 동시대에 청취하고 연주되던 촌스러운 컨트리 송, 가스펠 등을 다시금 학습하여 체득한 옛날 음악에 대한 오랜 흥미와 이해가 투영되었다. ‘Self Portrait’는 은둔 생활 후의 성과라는 측면이 있었고 ‘Self Portrait(자화상)=최근 3년간의 나의 흥미’인 메시지도 있었다. 1970년 6월 8일 ‘Self Portrait’는 발매되자마자 각 매체의 혹평을 받았다. 더 이상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밥의 마음을 평론가들은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평론가들 중에는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고 어거지로 논평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단의 혹평과 달리 앨범 판매량은 호조를 기록했고 미국, 영국 차트 모두 정상을 차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